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의 눈물 (문단 편집) === 고증 오류 === 분명 작품 자체는 엄청난 대작이지만 사실과 다른 부분 또한 여러 부분 있다. 작품 자체가 정사를 뼈대로 야사와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태종연의'''이기 때문이다. 삼국지 연의처럼 칠실삼허 정도로 보면 된다. * 본작에서 고려 왕조는 전반적으로 유약하고 노쇠한 모습으로 단순화되어 묘사된다. 그저 [[최영]]과 [[정몽주]]에게만 의지할 뿐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왕조 스스로도 저항을 시도했지만 본작에서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극의 시작이 [[위화도 회군]]에서 곧바로 시작하므로, 이 시점에서 이성계 일파의 세력은 이미 커진 상황[* [[위화도 회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쿠데타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있었던 저항이래봤자 개경을 지키고 있던 [[최영]]과 전투를 벌였던게 전부이다. 반란군이 족히 열흘은 걸리는 길을 오는 중에는 그 어떠한 저항도 없었다. 이성계의 세력이 빈약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었고 마지막 저항만 뿌리치는 단계에 접어들었으므로, 실질적인 주인공인 태종의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고려왕조의 이야기는 배경 설명 정도로 충분하기는 하다. 그러다보니, [[우왕]]과 그 가족들에 대한 묘사도 허술한 편이다. 먼저 우왕의 어머니로 나오는 [[정비 안씨]](안대비)가 지나치게 늙게 나오는데, 정비 안씨는 자세한 출생연도는 알 수 없으나 1366년에 [[공민왕]]의 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당시 15세 전후였던 혼인 적령기를 고려하면 위화도 회군 당시 안대비의 나이는 많아야 40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안대비 역을 맡은 [[한은진]]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미 극단 생활로 잔뼈가 굵었던 [[1918년]]생의 원로 영화배우로, 1997년 당시 이미 80세였다. 어째서 나이가 맞지 않는 노배우가 캐스팅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망해가는 왕조의 마지막 주춧돌의 이미지와 대궐에서 쫓겨나면서 [[신덕왕후]]에게 저주를 퍼붓는 장면은 극적인 효과의 측면에서 보자면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우왕의 부인은 [[최영]]의 서녀인 영비 최씨만이 등장하며, 영비가 마치 우왕의 유일한 비이자 [[창왕]]의 생모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우왕의 정비이자 창왕의 생모는 [[근비 이씨]]이며, 근비는 본 작품에서는 생략된다. 그 외에도 우왕에게는 근비와 영비를 제외하고도 10명의 부인이 더 있었다. 사실상 극적인 연출에 필요한 인물들을 제외하면 모두 생략된 것. 이러한 부분들은 2014년 [[정도전(드라마)|정도전]]의 고증이 더 정확하다. * 개국 초 이방원이 [[정도전]]에 의해 수세에 몰리자 [[권근]]을 자기 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해 이방원과 민씨 부인의 수양딸이 [[권근]]의 아들과 결혼하여 사돈이 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권근의 아들과 결혼한 것은 이방원과 민씨의 친딸(3녀 경안공주)이다. 극에서는 양녕대군이 이방원과 민씨가 결혼 후 10년만에 어렵게 가진 첫 아이로 묘사되는데, 이때문에 실제로는 양녕의 친누나인 경안공주를 친딸로 등장시키면 스토리가 꼬여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듯. 참고로 양녕대군은 위로 친형 3명(모두 요절)과 친누나 3명이 있다. * [[조사의의 난]]의 진압과정이 묘사되었는데 조사의 군대와 [[여진족]]이 연합할 것을 걱정한 태종이 [[하륜]]을 [[명나라]]에 보낸다. 당시 명나라의 황제는 [[영락제]]. 조선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데다[* 실제로 영락제는 즉위 이전에 사신으로 온 정안군을 직접 만났었고, 직접 화면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본작에서도 영락제의 입으로 설명되며 꽤 긍정적인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묘사된다. 또 내레이션으로 영락제의 어머니가 고려 출신 후궁이었다는 카더라를 언급하기도 한다.] 하륜을 마음에 들어 한 영락제는 여진족이 조사의 군대의 편을 들면 100만 군대를 보내어 여진을 박살내겠다고 공언한다. 이 소식을 들은 여진족은 패닉 상태에 빠지고 군대 충원이 안된 조사의의 군대는 결국 진압당한다. 하지만 반란이 평정된 실제 이유는 [[태종(조선)|태종]]이 직접 친정을 감행하여 진압군의 사기가 올랐고 [[청천강]]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한 것이지 명나라의 입김은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당시에 요동 지역에 명나라의 영향력이 그렇게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도 않았던데다가 조사의의 난이 진압된 시점은 1402년인데 이때 영락제는 갓 황위에 올라 親 [[건문제]] 신하들을 숙청하기에 바빴다. 이건 원래 <[[용의 눈물]]>이 조사의의 난을 끝으로 막을 내릴 예정이어서 [[조사의]]에게 [[최종 보스 보정]]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 하륜과 [[이숙번]]을 상당히 띄워주었다. 실제의 하륜은 상당히 경박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세종대왕|세종]]조차 '아버지가 안 봐줬다면 진작에 옥황상제 곁으로 갔을 인물' 이라고까지 평했다. 하지만 강직한 대신 전문 배우인 [[임혁]]의 [[배우 보정]]으로 오히려 탐욕스런 노신에서 지략가, 책사 이미지로 변모한 것. 이 덕분인지 이후 하륜의 비리에 대해서는 묻어가는 감이 있었다.[* 다만 하륜이 비리가 심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우고 행정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나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륜의 탐욕스러운 점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했던 세종 역시도 그가 재주가 뛰어나고 재상으로서 능력이 있는 점은 인정한바 있다. 그의 탐욕이나 비리가 묘사되지 않아 다소 미화된 것은 맞지만, 그를 명민한 지략가이자 책사로 묘사한 것은 정확하다. 인성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능력 자체는 좋았던 인물이었기에 아래 앙녕대군 미화에 비하면 사실 세발의 피다.] 이숙번 역시 [[선동혁]]의 연기와 각본 덕분에 정사에서 보여주던 탐욕스럽고 오만한 모습이 줄어들고 왕을 위해 악역도 불사하는 신하로 변모한 감이 있다. * [[양녕대군]]의 경우 아예 실제와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사실 양녕대군에 대한 미화는 조선 중·후반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뿌리가 깊고, 이 드라마의 원작이었던 《세종대왕》과 상당한 부분의 [[위인전]]마저도 이 설을 수용하고 있으니 비단 이 드라마만 탓할 일은 아니긴 하다. 그러나 오늘날 양녕의 '호쾌하고 왕재도 있었으나 스스로 권력을 버리고 쾌락을 즐긴 왕자' 이미지가 확대 재생산된 것의 상당 부분은 이 드라마 탓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양녕이 명나라로 떠나 영락제를 만나 황제 즉위 과정을 까는 후덜덜한 장면까지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이민우(배우)|이민우]]의 배우 보정이 단단히 한몫을 했다. 오히려 이민우가 양녕대군에게 매력을 느끼고 자신이 작가에게 양녕을 풍류객 캐릭터로 묘사하고 싶길 원해서 사실과 다르게 간지나게 나온 것. 이 드라마에서는 권력의 비정함에 실의에 빠지면서 점점 비뚤어져 가는 양녕이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미치광이스러운 막장짓을 어느 정도 뚜렷히 보여주긴 하지만 이를 마치 전부 양녕이 여러가지를 계산해서, 백성을 생각해서, 동생을 생각해서, 왕실의 미래를 생각해서 하는 일인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미치긴 제대로 미쳤는데, 뒤로는 혼자 자조하고 한탄하며 "아버지를 이해하라"고 충녕에게 조언하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앞뒤 자체가 맞지 않아 보일 정도다. 심지어 하루종일 여자를 끼고 술마시고 북치고 꽹과리치고 놀다가 배고파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고 왕실의 죄라면서 한탄하는 씬도 있는데 지켜보기 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노년에 들어 종손인 [[단종(조선)|단종]]을 무시하고 야심많은 조카 [[세조(조선)|수양대군]]에게 붙어 단종을 죽이라고 강권한 것을 보면 결국은 그도 아버지처럼 권력의 비정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양녕대군의 뛰어난 면모, 즉 양녕대군에게 왕재가 있었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것이다. 실록을 적극적으로 참고한 사극임에도 이런 방향으로 간 것은 <용의 눈물> 최대의 옥의 티라는 평가가 대다수. 그러나 유동근, 이민우의 불꽃 튀는 연기대결이 용의 눈물 후반부 인기를 견인한 것은 분명하다. * 양녕대군의 여성 편력에 대해 잘못 그려지기도 했다. 극 후반에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 양녕대군이 세자빈이었던 김씨와 기생 어리 두 명을 데리고 사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실록 기사를 찾아보면 어리는 광주로 쫓겨갔던 양녕이 몰래 도망친 것[* 작중에는 천하를 주유하자는 거러지 임금의 권유를 받아들여 떠나는 것으로 묘사된다.]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자 근심과 분을 이기지 못해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1030_006|자결]]한 것으로 나온다. 또 어리가 등장하기 이전에 양녕과 관계를 맺다가 제주도로 귀양에 처해진 기생 봉지련이 도중에 자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록에는 세종 5년에 봉지련이라는 관비(官碑)가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4028_003|등장한다.]] 물론 한 쪽은 기생이고 이쪽은 관비이니 동명이인이라 볼 여지도 있는데, 이렇게 보면 봉지련이 자진했다는 실록 기사가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011003_002|없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 [[정도전]]을 띄워주면서 지나치게 왜곡, 미화된 부분이 있는데, 요동 정벌을 '대조선 제국'이라는 거창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삼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 그가 '황제'국을 추구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현대적 의미로 제국이란 황제가 통치하는 국가라는 뜻과 함께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국가라는 뜻도 있으며, 전성기 시대의 고대 아테네를 '아테네 제국' 이라고 부르기도 하거나 공화정 시대의 로마도 로마 제국이라 일컫는 경우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국이라는 말 자체도 근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작중에서 정도전이 칭제건원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후반부 하륜과 이숙번의 대화에서 "[[고려]]의 자주적인 역사를 그대로 남겨준 정도전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고려국사》 편찬하며 고려가 사용한 황제국 용어들을 전부 제후국의 것으로 고쳐놓은 장본인이 정도전이고 그걸 원래대로 돌린 사람이 세종이다. 또 [[태종(조선)|이방원]]이 정도전이 개인적으로 지은 《조선경국전》을 보고 감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작 역사적으로 훨씬 중요한 '''조선의 첫 번째 성문법전'''인 [[조준(조선)|조준]]의 《경제육전》은 묻혔다. 그러면서 정작 정도전이 황제국을 추구하면서 '''제후국 조선'''이라는 잘못된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 [[1차 왕자의 난]]의 진행 과정에서 다소 오류가 있었다. 그 이전 사극의 1차 왕자의 난의 묘사에 비해 용의 눈물에서는 크게 진보한 모습을 보였으나 지적되는 것은, 왕자의 난 당시 남은의 첩실 집에,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포함해 대략 수어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난 발생 후 심효생 등 상당수는 현장에서 죽음을 당했고, 남은은 일단 피신했다가 자신감에 넘쳐 다시 돌아왔다가 살해되는 등의 과정이 무시되었으며, 남은의 첩실 집에는 정도전, 남은과 심효생만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나머지는 궁성을 이미 장악한 [[이방원]] 일파가 작성한 살생부대로 입궐하는 대로 한 명씩 철퇴로 때려 죽이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사실 대신들을 불러서 살생부에 따라 살해하는 장면[* 1990년 방영된 <파천무>의 살생부 씬을 <용의 눈물>에서 그대로 써먹었다.]은 [[계유정난]] 때 일어난 일이지 [[왕자의 난]] 관련 기록에선 찾아볼 수 없다.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과정에서 지붕 위에 [[노비]]로 변장해 올라가 살았던 이직을 죽여버리는 오류가 일어났고, 이후 실록에서 이직이 다시 등장하므로 [[부활|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벌어졌다. * 일부 사형 집행 장면에는 오류가 있다. [[박포]]의 처형 이후, 조사의의 난부터는 더 이상 극중에서 참형 등 다른 처형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오늘날의 총살형 비슷하게 사형수를 기둥에 묶어서 활을 쏘아 죽이는 처형 방식이 등장하는데, 그러한 형 집행은 조선시대에 없었다.[* 다만 조선시대 사형 집행 때는 중대한 사건이 있을 때 궁수를 배치시키기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활을 쏘아 죽이는 처형 방식은 천추태후에서도 재활용 하였다. 다만 용의 눈물이 화살을 한두발 정도 쏘아서 죽이는 거였지만 천추태후에서는 화살을 여러발 쏴서 죽이는 방식이었다.] 조선의 사형은 기본적으로 참형과 밧줄로 목을 옭아매는 교형으로 나뉘어 있었고, 거기에 최고형인 거열형과 그나마 명예를 지키게 해주는 사사 정도가 있었다. 극중에서 궁살형에 처해진 사형수들 가운데 [[양녕대군]]과 놀아난 구종수·이오방에 대해서 의금부에서는 능지처사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임금은 참형[* 실록에는 처참(處斬)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능지와 처참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처참은 문자 그대로 참형에 처했다는 뜻이고, 실록에도 의금부의 주청보다 강등하여 처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거열형이 말 그대로 생사람을 잡아다 사지를 찢는 형벌이라면 참형의 경우 한 번에 목이 날아가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어쨌든 거열형에 비해 빠른 죽음이었기에 강도가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을 선고하였고, 심온 사사 사건 당시 처형된 강상인은 거열형에 처해졌다. 다만 방송대본 데이터베이스에 실려 있는 <용의 눈물> 대본에는 실록대로 이오방과 구종수는 참형, 강상인은 거열형에 처해지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제작자가 너무 잔혹하다고 생각하여 촬영시에 순화한 모양. 다만 참형 자체도 실제 사실과 다르게 연출되었으며, 그 외 인물들의 처형 등의 사소한 묘사는 오류가 꽤 많은 편이다. * [[고려]] 말, [[조선]] 태조, 정종 연간까지 병졸들도 갑주를 잘 갖추고 창을 들고 나오다가 태종이 즉위하자마자 군제개혁이 되면서 병사들이 전원 포졸복으로 뒤바뀌고 당파를 드는 모습으로 나왔는데 이는 시대상으로 잘못된 연출이다. 이것은 조선군에 대한 일반적인 클리셰로 인한 것으로, <용의 눈물>에서도 이를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 한양 재천도(1405년) 후로 실질적으로 시즌 2[* 태조와 태종 두 명이 주인공이었던 부분이 시즌 1이라면, 태종의 치세가 다루어지는 부분. 실제로 110화는 시즌 1과 2의 간극을 잇기 위해 나레이션이 풍부하게 사용되었다.]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 110화가 언제쯤인지 애매하다. 일단 화가 시작될 때는 '한양천도 후' 라는 애매한 자막이 뜨며, 17분 30초 즈음 나오는 나레이션에서는 '그의 치세 10여년이 가까운 오늘' 이라 언급한다.[* 태종은 1400년에 즉위했으므로, 10여 년이 지났다면 1410년 전후가 된다.] 또한 22분 30초 즈음에는 극중에서 처음 나오는 명국의 칙사가 태종을 이미 한 번 이상 만난 적이 있다면서 '세월은 가도 전하께서는 여전하시다' 운운하며, 양녕이나 효령, 충녕 등을 맡은 배우가 아역에서 성인 역으로 바뀌었다. 즉 이런저런 정황을 보면 천도 이후 여러 해가 지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양녕대군]]이 아직 가례를 올리지 않았다는 것. 실제로 양녕의 가례는 1407년의 일이다. * 참수형을 집행하는 장면에서도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 전문적인 망나니를 불러서 참수한 건 맞지만, 청룡언월도 같은 긴자루가 달린 칼을 사용하지 않았고, 조선시대 참수형은 술 마시고 칼춤을 추다가 목을 베어버리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용의 눈물에는 [[https://youtu.be/txF2MPNAMXA|이러한 장면]]이 있다. * [[양녕대군]]은 폐세자 이후에 주어진 군호인데, 100화에서 [[원경왕후]]가 원자가 된 어린 양녕대군을 끌어안으며 '양녕' 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있다. 99화의 예고편에서도 '첫째 아들 양녕' 이라 나오는 걸 보면 원경왕후 역을 맡은 배우의 실수도 아니고 그냥 연출상의 오류다. * 이성계가 즉위한 이후 아들들의 호칭이 '군', '대군'을 혼용하고 있다. 가령 이방원은 '정안군', '정안대군'이라고 모두 부른다. 조선 초기에 호칭이 확립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당시엔 '대군'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군이라는 호칭은 태종이 즉위한 뒤 고려 시대의 오등작 제도를 폐지하면서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태종 즉위 이전의 '정안대군'과 같은 호칭은 실제 시대상과 어긋난다. * 왕실의 인물들이 곤룡포를 자유자재로 입는데, 일부 곤룡포의 경우는 용이 정면을 바라보는 형상의 보를 찬 후기형 곤룡포를 차고 있다. [[조선/왕사]]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곤룡포의 보는 측면으로 바라보는 용으로 새겨진 전기형 곤룡포와 정면으로 바라보는 용으로 새겨진 후기형 곤룡포가 있는데, 여말선초에서 후기형 곤룡포를 입는 것은 시대상으로 잘못된 것이다. 특히 [[이성계]]와 [[양녕대군]]이 옷을 이렇게 입는데, 이성계의 경우 청색/홍색 곤룡포를 여러벌 돌려입다 보니 간간히 후기형 곤룡포를 입는 장면이 나오고, 양녕대군 같은 경우 대군 시절 용포가 후기형으로 만들어져 있어 소품을 잘못쓴 오류인듯 하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모든 역사적 사실에 따라 극본을 쓰면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된다. 역사적 사실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해서 이 사극의 가치는 전혀 떨어지지 않음을 기억해두자. 뼈대는 거의 사실 그대로 전달한 편이다. 후속작 《[[왕과 비]]》처럼 왜곡이나 각색이 너무 심할 경우 비판을 듣기는 하겠으나 <용의 눈물>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물론 각색 역시도 훌륭해서 크게 문제시 된 것은 없다.[* 사실 《[[왕과 비]]》도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을 지나치게 그대로 인용한 것이 문제였지, 역사적 흐름을 작가 마음대로 바꿔버린 건 아니다. 요즘 제작되는 질 떨어지는 사극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작이다.] 한편 등장인물이 워낙에 많아서 그런지, 주연이든 조연이든 병든 티를 전혀 내지 않다가 역사상 죽을 때가 되면 갑자기 기침을 하거나 뒷목을 잡는 등 아픈 티를 팍팍 내다가 갑자기 픽 쓰러져 죽는다는 문제가 있다. 설장수 같은 경우 한양에서 개성으로 천도한 직후에 갑자기 조정 회의에서 뒷목을 잡더니 쓰러지며, 이화 같은 경우 민무구, 민무질 형제 사건을 처리하다가 심장마비로 죽는다는 연출도 있다. 조영무처럼 인상 깊었던 조연도 어느날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하기는 매한가지.[* 마찬가지로 등장인물이 많았던 무인시대에는 중요한 인물이 아닌 이상 해설로 사망처리했다.] 이 밖에 극의 내용 가운데 다소 감정적이거나 정도전이 조선제국을 주장하는 부분과 같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작가 개인의 감정을 실은 부분도 있다. 왕씨 몰살을 가리켜 세계사상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비극이라 하는 것이나[* 비극이지만 세계사상 예를 적잖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인데 당장 [[칭기즈 칸]] 같은 경우 유언으로 서하의 황족을 몰살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서하인은 씨를 말리라고 하기도 했다.], 정도전이 조선 제국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칭기즈 칸]]처럼 서역까지 진출할 수 있다고 역설하는 장면이 있다거나, 2차 왕자의 난을 '차마, 차마 일어나서는 안 될' 이라 한다거나, 정종대에 불꽃놀이를 본 일본 사신이 크게 놀라는 장면이 있는 등.[* 일본 사신이 놀라는 장면 자체는 [[http://sillok.history.go.kr/id/kba_10106001_006|역사적 사실]]이나, 극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남재가 이 자리에서 정안공을 세자로 책봉하자 하지는 않았다. 이 장면에서 포인트는 일본 사신이 아니라 실제로는 반년쯤 뒤에 있었던 [[http://sillok.history.go.kr/id/kba_10201028_002|남재의 발언]]이었으므로, 일본 사신이 딱히 등장할 이유가 없었다.] 이 부분은 1990년대라는 시대 배경을 생각하면 참작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환경 사극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형님전하 혹은 형님저하라는 국적불명의 호칭남발 또한 빼먹을 수 없는 흠인데, 사실 태조 왕건 못지 않게 이 작품에서도 저 호칭을 시도때도 없이 남발하는데, 문제는 저 호칭이 중요한 장면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와서 작품에 대한 몰입을 깨는데 은근히 일조했다. 실제로 유튜브 스트리밍에서 해당 용어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면 또님전하 혹은 또님저하 라고 비꼬는 댓글들이 태반일 정도이며, 그리고 이 괴상망칙한 호칭은 이환경 작가의 신작인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에서도 명맥을 이어간다. 159화나 되어서인지 극의 내용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가령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그를 알현한 명의 사신이 '선황(홍무제)께서는 전하를 내심 탐탁치 않게 보셨으나 지금의 폐하(영락제)는 전하를 좋아하시니 다행이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정작 홍무제는 정도전의 요구로 인해 사신으로 파견되어 온 정안군을 만나 보고 크게 감탄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극에서 다시 출연하지 않다 보니 1차 왕자의 난 이후에 반감을 드러내는 등의 묘사는 전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